2013년에도 어김없이 봄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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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 모락모락나는 신베이터우의 지열곡

타이페이 근교 단수이에서. 뒤에 보이는 바다는 아마 태평양?

타이페이 근교도시 단수이에 있는 진리대학.

딘타이펑 본점 앞에서 메뉴 연구중.

타이페이 국부 기념관에 들어가다.

겨울산이 보이는 2013년 2월의 창밖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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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유체역학자 시리즈를 facebook에 올린 선배의 글입니다. Poiseulle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개인적으로는 우리 학교에서 internal flow를 유체역학이 아닌 응용 유체역학으로 편성하고 응용 유체역학이 선택과목이라는 점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유체역학 하면 internal flow와 external flow인데 그것들을 배우지 못하고 졸업하시다니요! 제 홈페이지를 찾아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응용 유체역학을 가급적 수강하시고 혹시 기회를 잡지 못하시면 열전달을 꼭 수강하셔서 열전달에서 대류 부분을 주의깊게 공부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글을 쓰면서 보니 너무 공부 가르치는 선생 같은 말만 하는군요.

1822년 Navier에 의해 도입된 유동에서 점성의 영향은 전혀 의외의 분야인 '의학'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1797년생인 Poiseuille(쁘와제이유)는 당대 최고의 수학 물리학 교육기관인 에콜폴리테크닉에 1815년 입학하지만, 이어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왕조가 다시 등장하여 1816년 루이18세는 혁명정부의 사관학교인 에콜폴리테크닉을 폐쇄한다. 이때 Poiseuille는 급히 진로를 바구어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사의 길을 걷게 되지만, 여전히 그는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고, '심장 대동맥의 힘에 대한 연구'로 1828년 의학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는 이 논문에서 혈압과 혈액 유동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데, 이로써 '혈류유체역학(hemodynamics)'라는 학문이 탄생하게 된다.

1838년 Poiseuille는 일정한 압력차가 주어질 때 다양한 원관 내에서 유량이 어떻게 변화되는지에 대한 실험을 수행하여 그림과 같은 'Poiseuille의 법칙'을 발표한다. 그의 관심은 혈압의 변화가 혈관 직경의 변화에 따른 혈액 유동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를 위해 미세한 혈관들을 모사하기 위해 작은 유리관들을 만들어 실험했고, 가장 작은 유리관의 직경은 불과 15um(머리카락 굵기의 1/5)였다. 사실 Poiseuille가 처음 이 결과를 발표했을때 그는 점도를 몰랐고, 점도 μ는 그냥 상수 K로만 표기했는데, 이후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에서 이것이 Navier 방정식의 μ와 연관이 됨이 밝혀지고, 곧 이어 Stokes는 이 법칙이 Navier-Stokes 방정식에서 수학적으로 유도됨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해 보이는 이 'Poiseuille의 법칙'이 의미하는 바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동일한 압력에서 혈액의 유량은 혈관 직경의 무려 4제곱에 반비례한다. 어떤 경우 5mm 직경의 혈관을 막고 0.8mm 직경의 우회로를 사용하는 경우 유량은 (0.8/5)^4 = 0.00066 이므로 유량이 1/1000 이상 줄게되어 환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또한 심장 대동맥에서 인공판막이나 스텐트를 삽입하면 혈관 조직이 이런 인공물 안쪽으로 자라게 되는데, 혈관 직경이 3cm이고 이 조직이 불과 2mm 정도이므로 별것 아닌것 같지만 (2.6/3)^4=0.56이므로 혈액 공급이 거의 절반으로 줄게 되고, 다른 말로 하면 혈압이 두배로 증가할 수 있다.

아래 에펠탑에 Navier이름 새겨져 있다는 말을 적어 놓았는데 선배님께서 Navier에 관한 글을 facebook에 올리셨네요.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어 옮겨 봅니다.

‎1785년 Navier가 태어나고, 1789년 혁명이 발발하자 변호사인 Navier의 아버지는 국민의회 의원으로 혁명에 적극 가담하였다. 하지만 그는 1793년 사망하고, Navier는 엔지니어인 삼촌에게 맡겨졌다. 삼촌에 의해 대충 교육을 받던 Navier는 삼촌의 권유로 1802년 École Polytechnique에 진학하는데, 입학 성적은 거의 밑바닥이었다. 이때 Grenoble에 가기 전에 잠시 École Polytechnique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푸리에의 지도를 받게 되면서 Navier의 수학적 재능이 빛을 발하게 되었고, 푸리에 역시 Navier의 소질을 알아보게 되어 일생의 멘토가 된다. Navier는 1804년 졸업 후, 파리공과대학에 진학하여 프랑스에서 최고의 엔지니어로 주목받게 된다.

한편, Navier의 3년 후배인 Cauchy는 1789년 혁명의 해에 태어나는데, 당시 Cauchy의 아버지는 부르봉 왕조의 고위 관료로, 혁명이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지방으로 피신하였고, Cauchy의 가족은 1794년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며 '공포정치'가 끝나자 파리로 돌아왔다. 이후 나폴레옹이 집권하며 Cauchy의 아버지는 다시 고위관료로 중용되었고, 당대의 석학들인 라그랑쥬와 라플라스가 Cauchy의 집을 들락거리는 분위기에서 자란 어린 Cauchy는 학문적 깊이를 더하게 된다. 1805년 탑클래스 성적으로 École Polytechnique에 진학한 Cauchy는 1807년 졸업 후 Navier와 마찬가지로 파리공과대학에 진학하여 역시 최고의 엔지니어로 성장한다.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프랑스에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자 왕당파였던 Cauchy는 날개를 달고 École Polytechnique의 교수가 되었다. 혁명 엘리트를 키우기 위해 세워진 École Polytechnique은 당시 공화파 불순 학생들의 소굴이었고, 마침내 루이18세는 1816년 학교를 폐쇄한...다. 1년 뒤 학교가 다시 열릴 무렵, École Polytechnique은 재편되었고, 그 중심에는 과감하게 반대파를 제거해 나가는 Cauchy가 있었다. 한편, 이 시기 Navier는 모교인 파리공과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여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였는데, École Polytechnique이 폐쇄될 때 학생들 중에는 열혈파 운동권인 18살의 '콩트'가 있었고, Navier는 수학적 재능이 탁월한 그를 유심히 봐 둔다.

콩트는 1816년 학교가 문을 닫자 낙향하여 의학공부를 하다가, 도무지 메스가 손에 잡히지 않아 1817년 다시 파리로 상경하는데 이 때 콩트를 거둬들인 인물이 '생-시몽'이다. 1760년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 혁명기간 동안 부동산 투기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생-시몽은 '공포정치'시절 길로틴의 직전까지 갔다가 풀려났는데, 이후 '살롱'에 재산을 탕진하며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사회문제에 눈을 떠 가고 있었다. 특히 그는 혁명 엘리트 기관인 École Polytechnique을 동경하여, 수십년 손아래 젊은이들과 함께 수학하기도 했으며 학교 앞에 개인 연구실을 차렸고, 여기에 콩트가 합류한 것이다.

생-시몽과 콩트는 과학과 사회문제를 연결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황당한 학문적 작업들을 하고 있었는데, 이로써 '사회학'이 '사회과학'으로 탄생하고, '실증주의'가 탄생했으며, École Polytechnique의 과학적 업적들이 반영된 '과학적 세계관'이 출발하여 '역사의 진보'라는 개념이 탄생하였다. 1822년 생-시몽과 콩트는 결별하였으나, 이들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1815년의 왕정복고로 지식인 사회가 빠진 무력감에 다시 한번 혁명의 열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된다.

1830년 7월 혁명은 왕당파 Cauchy의 자리를 위협하여 결국 그는 추방되었고, 후임으로 공화파 Navier가 임명된다. Navier는 곧바로 평소에 봐두었던 32살의 콩트를 École Polytechnique의 '수학조교'로 임명하였다. Navier는 콩트의 사상을 적극 지지하여 과학기술이 인류 사회의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1836년 사망할때까지 과학기술과 과학적 사고방식을 사회 전반에 적용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후 콩트의 사상 체계는 1840년대 John Stuart Mill과의 교류를 통해 훨씬 발전하였으며, 근대 사회학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 1816년 École Polytechnique이 폐쇄될 때 학생 중에는 콩트 외에도 Poiseuille가 있었다. 콩트와 마찬가지로 Poiseuille도 학교가 문을 닫자 의학공부를 시작했는데, 자신의 업적으로 파리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될 것을 간절히 바랬으나, 죽을때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배 글 하나 더 인용합니다.  파리에 에펠탑은 설치 당시에 논란이 많았다고 하죠? 예술작품같은 파리에 이런 흉물을 들여놓다니...등의 평을 받았고 실제로 모파상은 에펠탑이 눈에 거슬려서 늘 에펠탑에서 밥을 먹는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에펠탑에서 밥을 먹어야 에펠탑이 안 보인다고. 그럼에도 에펠탑은 지금에 와서는 또 하나의 '고전'으로 불리우고 있고 도쿄 타워 같은 아류작도 만들어지게 하고 있죠. 프랑스인들도 에펠을 높게 평가해서 유로화로 바뀌기 전 프랑화를 사용할 때 에펠이 200프랑 지폐에 들어가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50프랑은 생 떽쥐페리, 100프랑은 세잔, 200프랑은 에펠, 500프랑은 퀴리 부부, 이공계 인물이 고액권을 차지하고 있군요) 에펠탑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과학자 수십명의 이름을 새겨 놓고 있는데 그 중 기계공학 교과서에 나오는 사람으로는 Navier-Stokes 방정식의 주인공 Navier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는 선배가 올려놓은 구의 항력 이야기입니다.  

1889년 에펠탑이 완성되자 에펠은 거물이 되었지만, 곧이어 터진 '파나마 운하' 실패에 따른 고소사건에 휘말려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스스로 일선에서 은퇴한다. 이후 그는 유체역학 연구에 몰두하여 애증이 섞인 에펠탑에서 실험을 시작하였다. 에펠은 수없는 철골 구조물 건설에서 바람이 건축물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중요함을 알고 있었고, 스스로 고안한 풍동(wind tunnel)에서 우선 가장 단순한 형태인 구(sphere)...가 받는 공기저항을 실험하였다. 곧이어 이 실험에 대해 프란틀과 논쟁이 붙었고, 여기서 유체역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 하나가 이루어진다.

그때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층류(laminar flow)보다는 난류(turbulent flow)의 항력계수가 크게 되는데, 이 실험에 사용된 구의 경우는 층류의 항력계수가 오히려 크다는 놀라운 결과가 관찰되었다. 유체의 항력은 마찰저항+형상저항으로 이루어지는데, 당시까지 연구된 항력은 관내 유동이나 평판 등으로 모두 마찰저항만 있었지만, 구와 같은 immersed body의 경우는 마찰저항 외에도 형상저항(form drag)이 작용하므로, 이 형상저항이 최초로 관찰된 것이 바로 이 순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구의 경우 층류의 항력계수가 커질까? 층류보다 난류는 모멘텀이 강하므로 그림에서 보듯이 구 뒤편에 발생하는 후류(wake)의 크기를 작게 한다. 후류 영역은 압력이 낮으므로, 후류 영역이 작아지면 압력차에 의한 형상저항이 작게 된다. 이는 야구의 너클볼이나 축구의 드롭킥에도 응용이 되는데, 빠른 속도로 난류를 발생시키며 날라가던 공이 속도가 떨어져 층류영역에 도달하면 갑자기 증가한 항력으로 순간적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그림에서는, 골프공 주위의 홈(dimple)이 낮은 속도의 층류에서도 난류를 발생시켜 항력을 감소시켜 비거리를 늘인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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